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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by Y_YP 2021. 12. 11.

 

짱 선주님의 갓 세카 미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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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카
 
 
 
 
복귀
 
 
3분 57초 뒤, 목적지 '지구'에 착륙합니다. 기체 이상 없음. 착륙지 확보 완료.
 
: 익숙한 기계음이 선체에 퍼집니다.
이제 3분 57초 뒤면 이 목소리와도 이별이겠군요.
삼 년 동안 함께한 만큼 다소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어요.
그도 그럴 게, 지난 삼 년 간 이 선체에는 최정림. 당신뿐이었습니다.
사람-혹은 그 비슷한- 목소리라고는 탐사 시작 첫 일 년 동안 지구로부터 오던 음성 편지, 통신 연락 그리고 바로 이 노바 09호의 안내 음성뿐이었습니다.
 
 
: 착륙 준비음이 들립니다.
 
10, 9, 8, 7…….
 
: 1990년에 지구를 떠난 지 자그마치 삼 년 만입니다.
장대한 임무가 끝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사랑해 마지 않는
삼 년 간 당신을 기다렸을 그 빛나는 연인에게로.
 
6, 5, 4…….
 
: 아, 드디어 지구가 보입니다.
곧 다가올 2000년 새 시대를 위해 당신은 광활한 우주를 다니며 인류를 위한 새로운 행성의 가능성을 탐색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깨달은 건 이보다 뛰어나고 완전하며 아름다운 행성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제 그 땅에 다시 안길 시간입니다.
 
3, 2, 1…….
 
Zero.
 
―!
 
: 억겁과도 같은 카운트 다운이 끝나자마자 온몸을 울리는 굉음과 함께 선체가 땅에 착륙합니다.
엄청난 진동이 당신의 몸을 울립니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건 비단 선체의 진동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설렘, 흥분, 꿈에도 그리워하던 것을 목전에 두었을 때의 그 긴장감일까요?
 
출입구를 개방합니다.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최정림 님.
 
: 열기가 빠져나가는 소리와 함께 우주선의 출입문이 열립니다.
 
최정림:(노바 09의 안내 음성이 끝나자마자 수도 없이 들이킨 찬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정림은, 들이킨 숨을 다시 내뱉을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고 땅에 발을 내딛었다. 떠나 있었던 탓에 발을 붙이고 선 지면과 몸 사이의 간격을 낯선 압력이 메꾼다.)
아, ...
 
: 당신은 걸음을 내딛습니다.
한 발, 한 발.
조종실을 벗어나 통로를 지나 저 끝에 환한 빛을 담고 있는 출입구까지...
따사로운 햇빛에 손차양을 드리운 채 당신은 선체에서부터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갑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당신을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이도,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군요.
 
: 다만 모두가 열렬하게 당신에게 박수와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 그렇습니다, 최정림. 당신은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달과, 별과, 해가 뜨는 곳.
당신의 고향, 빛나는 지구입니다.
오랜만에 듣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가 먹먹해집니다.
우주 한가운데에서 흡입형 레토르트 식품을 먹을 때보다 어째 현실감이 더 없는 기분입니다.
이제 계단에서 지구의 땅을 밟기까지 단 한 걸음.
 
: 숨을 가다듬고 우주복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낀 채 발을 내리려는 그 순간,
 
최정림 씨! 삼십 년 만에 지구에 복귀하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 하얀 가운들 사이에서 카메라를 든 어떤 남자가 불쑥 튀어나와 소리를 지릅니다.
순식간에 이목이 쏠리고 다른 사람들은 매우 당황한 티를 내면서 경비를 부릅니다.
금세 남자는 경비원들에게 제압되어 끌려나갑니다.
예전에 당신의 동료 하나가 착륙하자마자 몰려드는 기자들 때문에 실신을 한 뒤로는 모든 착륙은 비공개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는 몰래 잠입한 기자일 겁니다.
그런데.
 
: 삼십 년?
방금 저 남자가 삼십 년이라고 했나요?
그럴 리 없습니다.
당신은 삼 년 동안 우주를 돌아다녔고, 지금은 1993년입니다.
노바 09호의 달력에는 분명하게 1993년 x월 x일이라고 써 있었는 걸요.
당신이 삼 년 동안 쓴 일기가 이를 방증합니다.
 
: 그런데 가장 먼저 나와 자신을 반겨야 할 당신의 동료들은 다 어디를 갔나요?
낯선 얼굴들 뿐입니다.
떨리는 발이 땅에 닿기까지 당신의 눈에는 그제서야 풍경들이 들어옵니다.
 
2020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최정림 선배님.
 
: 풍경들을 채 다 훑기도 전에 계단 가장 앞쪽에 있던 사람이 화환을 당신의 목에 걸어 줍니다.
처음 보는 얼굴입니다. 신입일까요?
그런데 이 사람 왜 울고 있는 거죠?
 
: 최정림 심리학 판정
 
최정림:(헬멧을 벗어 들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본다. 낯선 풍경, 낯선 광경들, 2020년, 30년, ... 이래서야 장난은 그만두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딱, 해 보였다. 낯선 얼굴, ... 그리고 어째서인지 우는 낯.)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 성공적으로 임무를 끝낸 당신의 착륙 장면이 그리 감동이었던 걸까요?
...
사실 중요한 건 그게 아닐 겁니다.
 
: 방금 이 사람이 2020년이라고 말했잖아요?
삼십 년의 공백이라니. 믿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나저나 당신의 연인은 어디 있나요?
 
: 당신의 복귀를 누구보다 반겨줄, 당신의 연인.
영원히 변하지 않을 약속을 맹세했었던 당신의 연인.
우주 한가운데 홀로 그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들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애정의 대상.
 
 
: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갈 곳 잃은 당신의 시선들 사이로 모든 얼굴들이 혼란스럽게 휙휙 스쳐가고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현기증이 돌던 그 순간,
 
윤서경:안녕하세요, 최정림 선배님. ... 복귀를 축하합니다.
 
: 당신의 시야에 어딘가 낯익은 얼굴의 남자가 들어옵니다.
최정림. 온전한 중력입니다.
당신은 막연하게, 아니, 명백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시간과 달리 지구에서는 삼십 년이 흘렀다는 것과
 
윤서경:저는 당신이 지구 생활에 다시금 적응할 수 있도록 돕게 될 ... 윤서경이라고 합니다.
 
: 그 여백 동안 당신의 연인은,
 
윤서경:아버지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두 분이 한때 연인이셨다고요...
 
: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 최정림 SanC (2/1d3+1)
 
최정림:
SAN Roll
기준치: 50/25/10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3
 
: 그뒤로 기억나는 것은 억겁 같은 암전입니다.
 
 
 
깜빡, 깜빡.
 
: 눈꺼풀을 연신 감았다가 뜨면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옵니다.
 
삐이, 삐이―.
 
: 귀에 규칙적으로 바이탈 사인음이 들립니다.
삼 년 만의 탐사 종료.
그러나 삼십 년이 흘러 버린 지구.
마지막 기억들이 머리를 스칩니다.
 
윤서경:깨어나셨습니까?
 
: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
탁한 검은색 눈동자. 어딘가 낯익으나 그보다는 더 앳된 얼굴.
아까 보았던 그 남자입니다.
이름이 윤서경이라고 했던가요?
이 사람의 말을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습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옵니다.
 
윤서경:갑자기 쓰러지셔서 놀랐습니다. 혹시 제 얼굴 기억하시는지... (드문 드문 느리게 말을 잇다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푹 고개를 숙인다.)
 
최정림:(밀려오는 두통과 나란히 바이탈 사인이 들렸다. 애써 머리를 부여잡거나 고통을 호소하는 등의 행위를 보이지 않으려 미간만 슬쩍 좁히며, 정림은 눈 앞의 남자를 마주한다.) 기억이라뇨? (익숙한 이름 세 글자가 일전에 들었던 이름을 우선해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러니까, 당신 이름이.) 재성 씨?
 
윤서경:(낯익은 이름이 들리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다시 시선을 마주했다.) 저, 제 이름은 윤재성이 아닙니다. 그 분은 제 아버지십니다. 제 이름은... 윤서경 입니다.
(양 주먹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려둔 채 다시 입을 앙 다문다.) 궁금한 거 있으시면 답 해드리겠습니다.
 
최정림:(아버지, 라고 했다. 퍼즐 피스가 머릿속에서 들어맞는 동안 스스로가 알아왔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 흉곽을 옥죄는 느낌이었다. 갑갑하고, ... 어쩌면 생각나지 말아야 할 것들-이를 테면 당신은 내가 떠난 동안 결혼을 했을 테고, 이만큼 장성한 아들이 있어 결코 내가 끼어들지 못할 시간을 살았을 거라는...-이 떠올라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이 감각이 무색하게 양 뺨은 건조하기만 했고...) 미안합니다. 제가 실례했네요.
(이제 와서 재성의 안부를 물어도 괜찮은 것일까, 다물린 서경의 입을 바라보다 결국 가볍게 웃어보이기로 한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습니까?
 
윤서경:(힘든 일이다. 27년의 시간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이 쉬울 수 없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혼란을 위로하는 것도 주제넘는 짓일테니... 쉽게 말을 떼지 못하고 데굴 데굴 눈동자만 굴리며 할 말을 고르다 질문이 들린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답했다.) 그, 선배님께서 쓰러지신 이후로 쭉 있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는 않았습니다. 시간으로 말씀드리자면 3시간 정도 지난 것 같습니다.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아 쉽게 깨울 수 없었습니다.
 
최정림:계속이요. (정림은 서경을 바라보다 고생했네요,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내게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좀 있다면, ... (음, 짧게 가라앉은 소리를 내다 결국 입을 뗀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하는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아 무엇을 묻기에도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노바09가 이륙한 지 ... 꽤 됐다고요. (30년이라는 말은 구태여 뱉지 않았다. 그 무엇도 사실은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윤서경:그렇, 습니...다. (느리게 말끝을 흐린다. 또 정신을 잃지는 않을까 염려되는 듯 고개를 들어 파리한 안색이나 바이탈이 기록되는 장치를 번갈아 쳐다본다.)
여기는 센터 내에 있는 회복실입니다. 그, 아까 선배님께서 쓰러지신 후 가볍게 건강검진도 진행했다고 들었습니다. 별다른 이상은 없으나 정신적 충격이 있을 테니... 주의하시라는 말씀 전해드립니다.
저는 선배님의 지구 생활 적응을 도울 것입니다. 아, 저도 센터 연구원입니다. 그, 선배님의 후배입니다. (긴장한 듯 말이 주절주절 쏟아져 나온다.)
 
최정림:그렇군요. (체념인지 수용인지, 혹은 그냥 그렇다고 답을 하는 것인지 정림 스스로도 확실치가 않았다. 서경의 설명을 들으며 정림은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고, 센터 연구원이라는 말에는 잠시 놀란 듯 눈이 크게 뜨였다. 재성의 영향인 걸까, 물어보기에도 겸연쩍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 언급하지는 않았다.) 잘 부탁합니다. 윤서경이라고 했죠. 윤 연구원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윤서경:예. 그렇습니다. (준비되어있던 사람마냥 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짧았다.)
 
: 꼭 어릴 적 보던 만화나 SF영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당신의 시간은 삼 년이 흘렀는데, 당신을 제외한 모든 시간은 삼십 년이 흘렀다는 것이.
스물일곱만큼의 여백.
보통의 사람이라면 응당 단번에 감당하기 힘들 겁니다.
눈앞의 사람은 그런 당신을 보면서 잠시 머뭇거립니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요?
 
: 최정림 심리학 판정
 
최정림: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84
판정결과: 실패
 
윤서경: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의 그, 그러니까... 제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좀 전과 달리 머뭇거리며 겨우 말을 끝마친다.)
 
: 이런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다소 유감스러운 표정입니다.
그렇겠지요.
저걸 뭐라고 해야할까요?
동정의 느낌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좀 더... ...
 
윤서경:(말을 마치고 입을 다문다. 삐, 삐 바이탈 신호음만이 정적을 채우다가 다시 먼저 말 문을 텄다.) 혹시 몸이 괜찮으시다면 함께 센터로 가시겠습니까. 그동안의 지구 사정을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정림:내가 물으면 실례가 될까 싶어 묻지 않고 있었는데, (잠시간 헛웃는다. 어딘가 슬픈 것 같기도,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윤 연구원이 마음 많이 썼겠네요. 늦었지만 저도 고인의 가는 길 편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두통이나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중력을 제외하면 별로 아프다고 할 만한 곳도 없었다.)
 
: 당신은 윤서경을 따라 센터를 갈 것을 선택합니다.
그를 따라서 회복실을 나서 긴 통로를 거치면 천장이 꼭 하늘처럼 높게 자리잡은 거대한 중앙 관제 센터가 보입니다.
물론 그건 당신의 추측일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풍경이 당신이 기억하는 것과 너무 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컴퓨터를 비롯한 많은 기계와 장치들은 겨우 그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정도이고, 아예 처음 보는 듯한 기계들도 널려 있습니다.
꼭 하나의 영화 세트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겁니다.
 
: 당신의 발은 지구에 있는데, 오히려 우주 한가운데에 있을 때보다 더 길을 잃은 듯한.......
...
 
윤서경:저, 선배님. 이쪽입니다.
 
: 그만 아찔해져 다시 현기증이 돌려는 찰나, 팔목에 가볍게 온기가 느껴집니다.
당신을 안내하던 그 사람, 윤서경입니다.
당신의 팔목을 잠시 쥐었던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떼더니 시선을 돌려 가볍게 눈짓을 합니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보이는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트 타임라인과 그에 대한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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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이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윤곽이 조금이나마 보이는 것 같습니다.
1991년에 사라진 당신은 지구에서 사실상 죽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 년 동안, 아니, 십오 년 동안 지구는
당신을 기다리며 당신을 하나의 아이콘으로 만들었습니다.
 
최정림:(프로젝트를 손끝으로 더듬어가며 읽는다. 몇 번을 읽어도 사실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간, ... 센터가 귀환을 오랜 시간 기다렸다는 말이네요. 나는, ... 그간 죽은 사람이었다가, (더듬더듬 이어지는 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한다.)
 
윤서경:(정림이 타임라인을 읽는 내내 조용히 곁을 지킨다. 서경의 입장에서는 수 없이 읽었던 것이나 정림에게는 이 또한 스물일곱의 여백 중 하나일테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댁에는 돌아가실 수 없습니다. ... 사유 재산 등 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도통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에 걱정스런 눈으로 정림을 바라본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안정되실 때 까지 센터에 머무르라는 게 윗선에서 내려온 명입니다.
 
최정림:(눈을 감고 차분하게 숨을 내쉰다.) 집에도 돌아갈 수가 없다고요.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운 것들이 산재하는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잠시 아득해지는 것도 같다.) 그리고 그 동안 윤 연구원이 동행하겠고요.
... 이제 조금 두려운 것 같네요.
 
윤서경:예. 그렇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 이어 떨어지는 말에 제 입술을 살짝 씹는다.)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도 가보시겠습니까?
 
최정림: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정림은 그 말을 두어 번 더 반복했다. 정림이 정말 그럴 여력이 있었더라면 서경에게 편히 대해달라고,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을 텐데, ... 도저히 그 말이 나오지가 않아서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뗀다.) ... 전시 공간이요. 무엇을요.
 
윤서경:(괜찮아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서경은 쉬이 말을 떼지 못했다.) ... 선배님에 대한 모든 것을, 전시해둔 공간입니다.
 
최정림:... 나, 말입니까? (제대로 들은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것들이 다 뭔지, 차마 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이 어지러워 저도 모르게 휘청 하고 만다.) 나를 말입니까.
 
윤서경:선배님! (다급하게 휘청이는 몸을 붙잡으려다 차마 손도 닿지 못한 채 허공을 휘적인다.) 불편하시다면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송합니다.
 
최정림:(괜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이곳에 부재했던 시간보다 살았던 시간이-적어도 정림의 생각으로는- 더 많은데 공기가 텁텁하다는 생각이 든 건 왜일까, 구역질이 날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 것은 도무지 왜일까...) 아닙니다. (정림은 애써 숨을 고르며 제 눈가를 꾹꾹 누른다. 어차피 피하거나 미룰 수 있는 현실이 아니라면 일찍이 받아들이는 게 나았다.) 앞장서세요.
 
: 최정림 지능 판정
 
최정림: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85
판정결과: 실패
 
: 문득 머리에 스칩니다. 1991년 11월 3일.
그때 아마도 당신은 그날 후보 행성들 중 가장 마지막 행성에 들렀던 것 같습니다.
 
윤서경:예. 혹시 어지럽거나 몸이 안 좋으시면 바로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걱정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조곤조곤 말하다가 몸을 돌려 걷는다.)
 
: 윤서경은 당신이 받았을 충격을 걱정하는 것 같습니다.
지속적으로 당신의 안색을 살피고 당신의 의사를 우선시하는 것 보면요.
센터 측에서는 당신과 그의 사정 같은 것은 모를 테니 적절한 사람을 붙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도 그럴 게, 그를 제외한 센터 내 돌아다니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당신을.
 
: 최정림 듣기 판정
 
최정림: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42
판정결과: 보통 성공
 
저 사람 맞지? 그 여백.
 
너무 신기하다. 진짜 사진이랑 똑같아. 하나도 안 늙었어.
 
부럽다.
 
: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동물원의 원숭이라도 보는 것처럼 수군거리고 있으니까요.
그런 시선들이 달가울 리 없습니다.
 
최정림:(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온다.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아보지만 아득한 기분은 좀처럼 지울 수가 없다.)
 
윤서경:(주변 소리를 의식한 듯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버튼을 누르자마자 먼저 말을 뗀다.) 저, 선배님. 지금은 전시관에 아무도 없을 겁니다.
출입 제한을 두었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을 겁니다.
(꾸욱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다. 그걸로도 모자란 듯 서경은 입술을 잘글잘근 물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속도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뎌디게만 느껴지는지...)
 
최정림:(먼저 저를 챙기는 후배에게 해줄 말이 없다는 것까지 속에 얹힌 듯 힘이 들었다. 아, 차라리 그때 사망 처리가 된 채로, ... 나을 뻔 ... 여기 ... 일도 ... 없었을 텐데 ... 조각조각 끊어지는 생각을 붙잡으며 정림은 무심코 서경의 팔에 머리를 기대인다.) 미안합니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 곧 괜찮아지겠죠.
 
윤서경:괜찮습니다. (짧은 답과 함께 엘리베이터 숫자를 바라보던 눈이 주변에 수군거림에 한 번 시선을 주고 정림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다.)
 
: 서경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겨우 올라탑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니 수군거림이 멀어집니다.
엘리베이터는 17층을 향합니다.
17층에 내리자 복도가 세 갈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가운데 복도로 이어지는 곳에는 연구실 001~010이라고 붙어 있는 팻말이, 그 오른쪽 복도 입구에는 난외의 여백 전시관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다만, 왼쪽 복도는 팻말이 붙어 있지 않고 반대편 끝에 있는 하나의 출입문에 무어라 쓰여져 있습니다.
 
: 최정림 관찰력 판정
 
최정림: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66
판정결과: 보통 성공
 
: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보니 출입문에는 최정림 프로젝트 라고 쓰여 있습니다.
윤서경은 당신의 팔을 살짝 잡은 채 곧장 난외의 여백 전시관으로 향합니다.
 
최정림:(서경에게 이끌려 전시관으로 향한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 노바09에 대한 ... 겁니까? (자신의 이름을 보았음에도 언급하진 않았다. 그러자면 어딘가 거북한 느낌이 우선이었다.)
 
윤서경:네. 그렇습니다. 이곳은 노바 09와 여백에 대한 연구를 하는 곳입니다. (시선은 앞에 고정된 채 똑바로 전시관으로 향한다.)
그를 따라서 전시관으로 들어서면 관제 센터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전부 당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당신의 생애 연혁이 가득 적힌 벽면부터, 당신의 옷들을 포함한 여러 물건들, 그리고 당신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당신을 회고하는 인터뷰 영상들까지.
당신을 전시해둔 공간입니다.
 
최정림:(얼떨떨한 느낌, 익숙한 것들이 낯선 곳에 걸려 있으니 전혀 스스로가 그리워하던 것들 같지가 않았다. 옷가지들과 소지품에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전부 '내 것'인데. 좋아했던 스웨터나 워크맨 따위도 전부 여기에 있을까. 눈으로 더듬어 찾게 된다.)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는 물건들은 익숙하다 못해서 사무치게 그리울 지경입니다.
노바 09호 발사 전에 지구에서 당신이 입었던 스퉤어와 썼던 책상, 필기구, 비행 훈련 일지, 워크맨 등.
당신과 관련된 주요 물건들은 모두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가지 눈에 띄는 물건이 있습니다.
보름달 모양을 한 목걸이입니다.
 
: 당신이 탐사가 끝나면 자신을 기다렸을 연인을 위해 사 두었던 물건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주인이 없어진 물건이기도 합니다.
 
최정림:(익숙하고 낯선 소지품들 사이에서도 몰라볼 수 없었던 물건, 정림은 손을 뻗지 못한 채 주머니에 손을 꾹 찔러넣는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느릿하게 고개며 시선이 바닥으로 처박힌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적어도 서경의 앞에서는.)
... 물건들은 전부 내 집에서 가지고 온 겁니까? (그랬겠지요. 아무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감정을 눌러담기 위해 내뱉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윤서경:그렇습니다. 공식적으로 사망 판정이 내려진 이후에 전시관이 만들어졌습니다. ...아마 그때 쓰신 물건 전부 이곳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가져가실 수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빠르게 말이 쏟아지고 눈에 띄게 표정이 바뀐다. 끝이 늘어진 눈썹이 헤아릴 수 없는 감정 앞에서 감히 음울함을 나타냈다.)
 
최정림:... (어차피 이제는 그 무엇도 돌려받을 수 없다. 그리워했던 것은 그 무엇도 지구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선고받은 기분이었다. 긴 침묵 끝에 정림은 마지못해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괜찮습니다. 윤 연구원이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 그러니 그렇게 죽을 것 같은 낯을 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많은 게 바뀌었겠죠, ... ... ... (이렇게 쉬이 수긍하는 태도 기저에는 어느덧 슬픔이, 사무치는 그리움에 대한 체념이 자리하고 있다.)
 
윤서경:(죄송합니다. 뱉지 못한 말을 속으로 씹어 삼키고 입을 다물었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가 구석에 놓인 인터뷰 영상에 시선이 갔다.) 보시겠습니까?
 
최정림:(고개를 끄덕이곤 서경을 따라 눈을 돌린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낯선 형태의 영상이 되어 지나가고 있었다.)
가족부터 친구들까지 차례대로 당신을 회고하는 영상입니다.
가족들은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다며 눈물을 흘리고 있고, 친구들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학창 시절 이야기 등을 하면서 웃고 있네요.
그리고 그들 모두, 한눈에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들어 있습니다.
인터뷰 영상이 끝나자 잠시 나오는 검은 화면에 당신의 얼굴이 비칩니다.
서른 살의 청년. 도저히 방금 전 중년의 사람들과 같은 또래라고 보기 어려운.
 
: 이제서야 당신은 새삼 또 실감합니다.
 
지구에서 부르던 말대로 자신은 '여백' 그 자체가 되었음을.
 
: 최정림 SanC (1/1d3)
 
최정림:(잠시 그 자리에 멈춰선다. 그제서야 메말랐던 낯에 물기가 천천히 번졌다.)
SAN Roll
기준치: 47/23/9
굴림: 30
판정결과: 보통 성공
 
윤서경:(인터뷰 영상이 끊어지고 정적이 감돈다. 내가 실수한 걸까. 괜히 모시고 온건 아닐까... 불안함에 여태 허공만 돌던 손이 정림의 손목을 감싸쥐었다.) 선,배님...
죄송, 합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선,배님... (무너지면 어떡하지. 이 사람이 무너지면 ... 볼 안쪽 살을 씹으며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감정에 쉽게 동요되는 탓이었다. 다른 손을 올려 겹쳐 잡은 채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무 생각, 하지 마시고... 방으로 가시면... 괜찮을 겁,니다.
 
최정림:(서경이 제 손목을 쥐는데도 마치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정림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소리 한 번을 내지 않고 눈물이 새어나오는 동안, 정림의 앞에서는 익숙한-익숙하지 않은-낯들이 차례에 차례를 더해 지나갔다. 서경의 말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모양만 몇 번 벙긋대다가 그만둔다.)
... (그 누구도 정림이 사는 절망은 다시 살 수 없을 것이다. 정림은 서경의 눈을, 머리칼과 뺨을,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 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겹쳐 쥔 온기 때문에 더 사무치게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서경은 영원히 몰랐으면 했다.)
 
윤서경:(축축하게 젖는 뺨을 바라보는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속으로 되뇌이다가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억지로 맞잡은 손에 힘을 주어 우두커니 서있는 몸을 당겼다.) 선,배님... 이만 가셔야 합니다. 이대로 가만 있으면 몸에 안 좋습니다. 쉬셔야 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제가 죄송합니다.
 
최정림:(서경이 몸을 당기자 탁, 하고 긴장이 풀어지듯 대번에 몸이 쏠린다. 어디로 가자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방에는 혼자, ... 있고 싶습니다. 미안합니다.
 
윤서경:(정림의 말에 소리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축 쳐진 눈썹이 땅에 쳐박혀있던 시선을 따라 늘어졌다. 정림의 뒤에서 묵묵히 따라가다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의식적으로 손목을 잡아끌었다.) 따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쉬셔야 하니까...
 
: 서경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갑니다.
서경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합니다. 당신을 숙소로 데려다주는 일 말이죠.
어느 낯선 문 앞에 당신을 데려다주고서야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줍니다.
당신이 들어가는 걸 보고 있겠다는 듯 아무 말 없이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최정림:(묵묵히 서경을 따라 방에 도착한다. 한참 문 앞에 저를 보고 서 있는 서경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결국 떨리는 숨과 함께 미안합니다, 한 마디를 하고 서경의 손을 쥐었다가 놓았다.)
 
윤서경:아닙니다. ...좋은 밤 되시면 좋겠습니다. (고개를 깊게 숙였다가 다시 똑바로 선다.) 무슨 일 있으시면 도우러 오겠습니다. 그럼...
 
: 서경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갑니다.
가면서 계속 뒤를 힐긋이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불안한 듯이...
 
최정림:(별다른 저항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간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생각은 이미 뒤로 묻은 지 오래다.)
 
: 숙소로 들어가자 침대와 책상, 소파, TV, 책장 등이 마련되어 있는 아늑한 공간에 도착합니다.
방 안에 있는 TV는 물론이고, 가구들까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일상의 공간이라 더욱 시간차로 인한 이질감이 크게 다가옵니다.
하물며 방 벽지 색까지도.
저녁이 오기 전에 간단하게 방 안을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정림:(모든 것들이 낯설기 그지없어 문 앞에 선 채로 한참 방 안을 바라보았다. 어디에 앉기도, 눕기도 어색했다. 그 중에서도 역시 제일 어색한 것은 직사각형의 검은 ... ... 표면이, ... 그 앞으로 가만 다가가 선다. 검은 화면 앞에 비친 제 모습이 영상의 그들과는 확연히도 다른 모습이라, 다시금 그 사실에 화가 났다.)
 
: TV
모서리에 동그랗고 얇은 버튼이 보입니다.
눌러볼 수 있습니다.
 
최정림:(...) (꾹)
 
: 환한 빛이 쏟아집니다.
당신이 알고 있던 TV보다 얇고 견고한 모습의 기계입니다.
TV에서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십여 년 전에 있었던 비행기 사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생존자는 겨우 한 명. 비행기의 엔진 결함이 원인이었다는 내용이 나오고 있네요.
 
최정림:(빛이 쏟아져나오자 잠시간 움찔 해서는 저도 모르게 팔로 눈앞을 가린다. 흘러나오는 영상이나 소리에 이게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멀뚱히 바라보다 얇은 티비 뒷면을 확인하고는 어, ... 하며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 다 끝나가던 걸까요?
진행하던 사람이 종료하는 멘트를 하고 곧 프로그램이 끝납니다.
낯선 물건을 홍보하는 광고가 스쳐지나갑니다.
이또한 거대한 여백의 연장선입니다.
 
최정림:... (넋 놓은 듯 한참 바라보고 있는다. 신기하기도, 어색하기도 해서.)
 
: TV 옆에는 책장이 놓여있습니다.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는 게 보입니다.
 
최정림:무슨 책이 이렇게, ... (책장으로 다가가 책등에 쓰인 제목들을 훑어본다.)
 
: 책장
천체 물리학에 대한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습니다.
 
: 최정림 자료조사 판정
 
최정림: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89
판정결과: 실패
 
: 표지에 타임 패러독스라고 써있는 책을 발견했습니다.
흥미가 가나요?
 
최정림:...? (책을 꺼내본다.)
 
: 책은 시간과 관련된 여러 역설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과거에는 내가 둘이 존재하게 된다는 역설입니다.
어려운 용어로 써있으나 당신에게는 쉽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정림:(조금 더 넘겨본다. 읽을 수 있나.)
 
: 역설에 대한 얘기만 계속 이어집니다.
과거로 돌아가도 내가 둘이 존재하게 된다니
누구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요.
...
당신이 한참 집중하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저녁 식사가 도착합니다.
반찬이 여러 가지 놓인 한정식입니다. 평범한 나물 몇 가지와 김치, 그리고 불고기입니다.
 
: 다행히 음식 메뉴는 익숙합니다. 별세계 음식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레토르트가 아닌 제대로 된 식사 역시 삼 년 만입니다.
감회가 새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정림:(3년간 우주선 안에서 먹었던 음식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들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허기진 탓에 음식이 달갑게 느껴진다는 게 처음으로 감사한 일처럼 느껴졌다. 제대로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고 식사를 하기 시작한다.)
 
: ...
식사까지 끝나고 나면, 긴 하루가 끝납니다.
침대는 크게 변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은 것 같지만 이곳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죠.
잠을 청하는 게 좋겠습니다.
 
최정림:(지칠 만도 한 하루였다.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 속으로 몸을 푹 파묻었다.)
 
: 푹신한 침구에 들어가자 제법 편안합니다.
정신적으로 피곤한 탓인지 잠이 몰려옵니다.
정림,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뭐가 되었든 이곳은 달도, 별도, 해도 뜨는 곳. 당신의 지구입니다.
중력처럼 눈꺼풀을 감고 나면.......
 
 
 
깜빡, 깜빡.
 
: 낯선 천장이 보입니다.
선체 상태를 보고하던 노바 09호의 음성도 들리지 않습니다.
여기는 2020년의 지구니까요.
아침이 배달되고 식사를 마치면 옆에 두고 잤던 무전기가 보입니다.
이제 오늘은 무얼해야 하는 거죠?
하루가 지났는데도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듭니다.
 
: 분명 발은 땅에 붙어 있는데 영영 우주 한가운데를 떠도는 미아가 된 것 같은.......
 
최정림:(막막한 기분에 멍하니 무전기 바라보다 집어든다. 어디로 연결되는 거지. 혹시 윤 연구원일까.)
 
: 무전기를 집어들던 그 때
 
똑똑
 
: 누군가 문을 두드립니다.
 
최정림:누구십니까. (문 밖까지 가 닿을 명료한 목소리.)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똑똑
 
: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최정림:(결국 일어나 문을 열고 고개만 내밀어 바깥 슬쩍 내다본다.)
 
: 문을 열여보니 보이는 건...
윤서경 입니다.
그는 머뭇거리더니 문 밖에 서서 쪽지를 하나 내밉니다.
 
: 센터에서는 당신은 최소 일주일 동안 센터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얼굴을 보니 몰래 땡땡이라도 치는 고등학생처럼 긴장되어 보입니다.
이런 걸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최정림:(도청? 뒤돌아 방을 바라보다가 문 닫고 바깥으로 나온다. 입모양으로 지금요? 하고 의아하다는 듯 다시 물어보았다.)
 
윤서경:(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주변을 슬쩍 둘러본다. 입 밖으로 말을 뱉지는 않았다.)
(내키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물러날 것 처럼 그저 정림을 바라볼 뿐이었다.)
 
최정림:(이래도 괜찮은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센터든, 바깥이든 낯선 것은 마찬가지고, 서경의 말대로 도청을 당하고 있는 거라면 별로 방 안에 있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 윤서경은 대답을 듣더니 희미하게 웃습니다.
2020년의 지구라니.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요?
...
...
그를 따라서 센터 밖으로 나가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 센터를 함께 구경하는 척하면서 쏙 주차장으로 빠져 그의 차를 타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저기 경비원이 보이네요.
걸리면 무슨 소릴 들을지 모르니까요.
 
: 최정림 은밀행동 판정
 
최정림:(최대한 자연스럽게... 없는 듯... 지나간다.)
은밀행동
기준치: 30/15/6
굴림: 56
판정결과: 실패
 
: 경비원 어? 당신은...
수상하게 여긴 경비원이 다가옵니다.
영 수상하다는 듯이 훑어보는 저 눈빛...
뭐라고 변명하죠?
 
: 최정림 대인기능 판정이 가능합니다.
 
최정림:... 네? 저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서경을 쿡 찌른다.)
 
윤서경:(쿡 찔리자 머뭇거리다가 경비원에게 조곤조곤 말을 한다.) 저... 선배님께서 신식 차가 궁금하다고 하셔서...
제가 보여드리려고 잠시 내려왔습니다. 별 일 아닙니다.
 
경비원: 아~ 그러시다면 뭐.
 
: 경비원은 금방 납득했다는 듯이 물러납니다.
구경도 전에 돌아갈 뻔했네요!
 
윤서경:(삐질삐질. 거짓말을 했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 듯 경비원의 뒤통수를 빠안히 바라본다.)
 
최정림:(안도의 한숨!) (나 때문에 잘리는 건 아니겠지, ... 영 불안한 눈빛으로 서경을 바라본다.)
 
윤서경:(경비원의 뒤통수를 바라보다가 먼저 척척 걸어가 차 문을 연다. 운전석 문을 열며 정림을 바라봤다.) 이 차에 타시면 됩니다.
 
최정림:(열어주는 대로 조수석에 동승한다. 신기한 듯이 내부를 훑어보았다.) ... 정말 많이 변하긴 변했네요.
 
: 조수석에 앉자 그제서야 차 내부가 눈에 들어옵니다.
주차장에 놓여 있는 차들이 전부 낯선 외관들이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역시나 버튼 하나만 꾹 눌러서 시동을 켜는 그의 모습이 다소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삼십 년 동안 인류는 끊임없이 발전했습니다.
오로지 당신만 1990년에 둔 채로.
...
 
최정림:(차 키를 꽂지 않아도 되나? 무슨 버튼이 많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참 바라보다 뒤늦게서야 씁쓸히 웃으며 눈 내리감는다. 알지도 못하는 곳에 홀로 떨어진 기분, 차라리 노바나 지구 바깥의 대기가 훨씬 익숙하게 느껴질 테다.)
 
윤서경:(정림과 차를 번갈아보다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 선배님.
 
최정림:... 예? (고개 돌려 서경을 마주본다.)
 
윤서경:지난 달에 따긴 했으나... (눈을 깜빡이다 조심스레 핸들을 쥔다.) 조심히 잘 모시겠습니다.
 
: ...
믿어도 되겠죠?
 
최정림:(안전벨트 찰칵. 단단히 부여잡는다.) ... 알아서 잘 할 거라고 믿습니다.
 
: ...
조금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으나 윤서경의 차가 주차장을 벗어납니다.
조금 느린 거 같지만 착각이겠죠.
지나가는 풍경은 역시나 낯설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지 않나요, 정림?
지난 달에 면허를 딴 초보운전의 차에 타 있긴 하지만...
 
최정림:(처음에야 서경 쪽을 힐끔거리며 불안해하기는 했으나, 주차장을 벗어나자마자 보이는 이광경에 금세 눈은 창밖으로 돌아간다.)
...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윤서경:(한참 핸들을 쥐고 집중하다가 아, 짧게 소릴 내더니 힐긋 힐긋 글러브 박스를 바라본다.) 저, 선배님.
그, 선배님께서 2020년의 지구에서는 너무 유명인이라서... 음. (힐긋 거리자 아주 약하게 치가 일렁인다. 헛, 소리와 함께 핸들을 꼭 붙잡고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변장을 하셔야 합니다.
 
최정림:예? (덩달아 글러브박스로 눈을 돌렸다가 한 차례 차가 움직이자 헙, 숨 들이키곤 다시금 안전벨트를 부여잡는다.) ... 변장을요. 어떻게요?
 
윤서경:그, 글러브 박스 여시면 제가 준비해둔게 있습니다.
 
: 또 차가 양옆으로 일렁일지도 모릅니다.
서경이 또 시선이 돌아가기 전에 여는 게 좋겠어요.
 
최정림:예, ... (부디) 운전에 집중하세요. (영 불안한데. 서경 쪽을 바라보다가 글러브 박스를 열어 안을 확인한다.)
 
: 글러브 박스를 열자 보이는 건...
모자, 아이라이너, 안경, 그리고 마스크, 말 탈 입니다.
..
골라서 쓰면 되겠어요.
 
최정림:(다소 당황스러운 물건도 있었던 탓에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어버린다.) 이걸, ...로 변장을 하라고요?
 
윤서경:저... 그, 펜은... 점을 찍으면 다른 사람으로 알아차리는 2008년 드라마... 그게 생각나서 챙겼습니다. (시선은 앞에 콕 고정된 채 중얼인다.)
점을 찍으면 못 알아볼지도 모릅니다.
 
최정림:... 요즘은 그런 게 먹힙니까? (그간 인류의 시력이 단체로 퇴화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셈이나 다름없지 않나. 아이라이너를 집어들고 창문으로 제 얼굴을 바라보다 오른쪽 눈 아래에 콕, 작게 점을 찍는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빤히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다 정림은 마스크를 집어들었다.)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진 않겠죠.
 
윤서경:괜찮을 겁니다. 어... 불안하시면 모자도 쓰시면 될, (또 힐긋 바라보다가 바로 앞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제 운전 실력을 본인도 못 믿는 듯...)
 
최정림:... ... ...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마스크를 쓰고 손목에 있던 밴드로 짧은 머리를 대충 묶는다.) 그, 앞에 보세요. 믿...고 있습니다.
 
: 나름 그럴 듯하게 변장을 마치고 나면...
목적지에 도착한 듯이 그의 차가 멈춥니다.
....
 
카페
 
: 그가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걸어 도착한 곳은 영어로 STARBXXKS라고 적힌 곳입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둘을 반갑게 맞이하는 직원들과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아무래도 음악다방 같은 곳인 것 같은데......
DJ는 보이지 않고 노래만 흘러 나옵니다.
직원의 뒤로는 무언가 적혀있는데...
아메리카노, 카페 라떼, 카페모카, 캐모마일 티, 프라푸치노, 기타 등등... 이게 다 뭐죠?
 
윤서경:저, 선배님. (궁금한 걸 물어보면 설명해주겠다는 듯이 멀뚱멀뚱 정림을 바라본다. 미약하게 눈에 빛이 도는 것도 같았다.)
 
최정림:(두리번거린다. ... 찻집, ... 다방? 깨알같은 글자들을 읽어내려가면 별별 이름들이 다 써 있다. 저게 뭐람, 결국 정림은 멋쩍은 듯 서경을 올려다보며 소근거린다.) ... 그러니까, 뭘 해야 되는 겁니까?
 
윤서경:저기 아메리카노라는 것은 블랙 커피... 그러니까 달지 않은 커피입니다. 그리고 라떼는 우유를 넣은 커피고... 또 모카는... (설명하다가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한 번 감쳐문다.) 음... 단 커피입니다.
캐모마일은 녹차같은 티의 한 종류입니다. 그리고 프라푸치노는 어... 얼음을 넣고 갈아놓은 음료입니다. 혹시 더우십니까?
 
최정림:음, ... (대충 알겠다는 듯이 빤히 앞을 바라보다가도 쉽게 결정은 내리지 못하고 다시 묻는다.) 저 중에서 윤 연구원이 제일 좋아하는 건요?
 
윤서경:저, 저는 어... (두리번 거리다가 바닐라 라떼라고 적힌 글씨를 가리킨다.) 쓰지 않아서 좋습니다. 저는 쓴 커피는 잘 못 마셔서... (말 끝을 흐리다가 눈을 데구룩 굴린다.) 선배님께서는 단 음료를 좋아하십니까?
 
최정림:(서경이 가리킨 것을 바라보다가 귀엽다는 듯 픽 웃는다.) 아뇨, 실은 단 걸 잘 못 마셔서. 달지 않고 따뜻한 음료면 됩니다. 그냥 차도 괜찮고 ...
 
윤서경:그렇다면 제가 적당히 시키겠습니다. (짧은 답과 함께 직원과 몇 마디를 나눈다.)
 
: 윤서경이 음료를 시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음료를 주문하고 받아 둘은 테이블에 앉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의아한 광경이었을 것입니다.
누가 봐도 젊은 나이의 당신에게 그가 열심히 아메리카노며 프라푸치노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었으니까요.
 
윤서경:(테이블에 앉자 정림의 앞으로 아메리카노를 밀어준다.) 이것은 아까 설명드린 아메리카노 입니다. 단 것을 첨가하지 않았으니 단 맛은 거의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 혹시 드시다가 너무 쓰면 제가 시럽을 넣으드리겠습니다.
 
: 재잘재잘 떠드는 서경과 아메키라노라는 음료.
낯선 곳에서 마시는 낯선 음료지만...
괜찮을지도 모르겠네요.
 
최정림:(서경의 주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테이블에 앉는다. 그나저나 음악이며, 사람들이며, 많기도 하고 ... 다소 어색하고 시끄럽기도 하고. 서경에게 음료를 받아들며 연신 주변을 둘러본다.) 고맙습니다. (역시 직장 선배라 그런 걸까, 이런 소리까지 보고를 올리는 것처럼 하는 게 영 어색하기도 하고.) 그, 어색하지 않다면 그냥 편하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사실은 어제 그렇게 서경을 돌려보낸 것이 영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윤서경:아, 그러겠습니다. 선배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제 몫의 얼음이 동동 들어있는 바닐라 라떼를 마시다가 정림을 바라본다. 어제 일은 잊어버린건지 그저 음료를 마시기 만을 기다리는 듯 빠안히 정림을 바라봤다.)
 
최정림:(그러겠다는 말에 그제서야 조금 웃어보인다. 처음 마시는 음료라 그런지 잠시 주저했지만, 곧 입에 대 보고선 낯설지만 나쁘지 않은 향에 한 모금 넘긴다.) ... 이걸 뭐라고 부른다고요?
 
윤서경:아메리카노라고 합니다. (정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긴장한 듯이 입술을 앙 다문다.) 아메리카노... 마음에 안 드십니까? 역시 너무 달지 않아서 입맛에 안 맞으시다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했다.)
 
최정림:(레귤라커피나 까페오레, 레쓰비 같은 캔커피나 마셔 봤지, 이런 식으로 다방에서 큰 컵에 나오는 커피는 또 처음이다. 묘하게 심심한 맛이기는 해도,) 아뇨, 신기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타 주는 커피는 처음이기도 하고 ... (서경이 마시는 음료와 주변 사람들이 마시는 것들도 둘러보다가,) 이런 데가 많이 있나요?
 
윤서경:(엉덩이가 살짝 들리다가 대답을 듣고서야 다시 의자에 붙는다. 눈을 깜빡이며 정림의 말에 집중하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같은 이름의 가게도 많고 또 비슷하지만 다른 ... 곳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공부를 하기도 하고 또 따로 개인적으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저와 선배님 처럼... 음, 음...
 
: 최정림 심리학 판정
 
최정림:
심리학
기준치: 50/25/10
굴림: 25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언뜻 그의 얼굴에 쓸쓸하다고 말하기에도 부족한 감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어떤 지독한 외로움 같은.......
 
윤서경:(말끝을 제대로 맺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는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최정림:(서경의 낯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올려 희미하게 웃는다. 정림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표정, 구태여 모르는 체 밝은 투로 말 잇는다.) 그건 별로 다르지 않네요. 시간을 뺏는 게 아니라면 자주 오면 좋겠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말로 아는 사람이 윤 연구원밖에 없어서... (제가 말 꺼내놓고도 멋쩍었는지 결국 말을 돌린다.) 여기, 신청하면 음악도 틀어 줍니까?
 
윤서경:아. 일반적으론 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듣고 싶으신 음악이 있으면 제가 전하고 오겠습니다. 듣고 싶으신 음악이 있으십니까? (또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엉덩이를 슬쩍 든다.)
 
최정림:아. 그렇습니까? (서경을 흘끔 보다가 고개 젓는다.) 내가 아는 노래면 너무 옛날 음악이지 않습니까, 가수도 남아있을지 알 수 없는데 ... 다만 이런 음악이 좀 어색해서요. 윤 연구원도 이런 걸 좋아합니까?
 
윤서경:(일어나려던 몸이 그대로 멈춘다. 정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음, 가수는 남아있지 않아도 음악은 남아있을 겁니다. 선배님께서 좋아하시는 노래면 꼭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에서 못 들으시더라도... 제가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정림의 소지품 중에 워크맨이 있던 것을 떠올린다.) 비슷한 기계도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말만 하시면 ...!
 
최정림:(서경의 태도에 진정하라는 듯 손 뻗어 팔을 토닥인다.) 음, 전에는 이상원이나 장필순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좋아하기는 했습니다만 ... 노바 09가 출발하기 전엔 잊지 말기로 해, 라는 노래를 자주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워크맨 말인가요? ... 요새에는 더 좋은 기계가 있기야 하겠지요, (다만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음, 하며 짧게 망설이는 듯한 소리를 낸다.) 윤 연구원이 가지고 다니는 건요?
 
윤서경:(잊지 말기로 해, 듣자마자 핸드폰을 들어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멈춘다. 워크맨... 비슷한 기계는 없으니 가장 가까운 것은 핸드폰일지도. 잊지 말기로 해. 라고 검색하던 화면 그대로 정림에게 보여줬다.) 2020년에는 핸드폰으로 노래도 들을 수 있고, 또 길을 찾을 수 있고, 음... 게임이나 여러가지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일주일 정도 지나면 선배님께도 이 비슷한 기계가 지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니, 이 보다 훨씬 좋은 기종이 지급될 것입니다. 그때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더 좋은 것을 준비해드릴 수도 있고... (구구절절 쓸데없다 싶은 말까지 붙이다가 입을 다물었다.)
 
최정림:(서경이 보여준 네모난 기계 속 글자를 바쁘게 읽어내린다.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가장 크게 쓰여 있던 노래의 제목과 가수 이름, 발매일자나 앨범 그림 등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핸드폰...이요. 그러니까 이게 테이프 재생이랑 ... 길도 찾아주고, 게임도... (그런데 아무리 봐도 테이프나 씨디가 들어갈 만한 공간은 안 보이는데. 눈 가늘게 뜬다.)
... 지급이 된다고 해도 쓸 수나 있을까요, (으음, 짧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서경이 내민 것을 바라본다.) 복잡하네요. 그보다 윤 연구원이 들고 있는 건 너무 작아서, 그걸 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윤서경:사용법은 간단합니다. 아마 어렵지 않으실겁니다. 특히 선배님께서는 유능하신 분이시니까... 여럽지 않게 잘 사용하실 겁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주절주절 말을 잇다가 핸드폰 시계를 보더니 일어난다.) 이만 다음 장소로 가야겠습니다. 어, 음료는 다 드셨습니까?
 
최정림:든든하네요. (화면에 뜬 숫자 흘끔. 저건 또 뭐지? 고개 기울이다 따라 일어난다.) 다 마셨습니다. ... 차를 타고 이동합니까?
 
윤서경:(먼저 일어나 음료 컵을 정리하고 오다가 정림을 바라본다.) 예. 그렇습니다. (무슨 문제있냐는 듯이 바라본다. 본인의 좀 전 운전실력은 기억 안 나는 듯.)
 
최정림:(아니라는 듯 웃어보인다. 그래, 저렇게 애쓰는데.)(^^...)
 
윤서경:(???)
 
: ...
당신은 또 서경의 차를 타러 갑니다.
...
아까처럼 아슬아슬한 운전과 함께 도착한 곳은...
 
: 그와 함께 들어선 곳은 CGX라고 적힌 곳입니다.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고 공중에 매달려 있는 모니터들에 상영 시간표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는 영화관인 것 같습니다.
 
최정림:(신기한 듯 영화 포스터들을 주욱 둘러본다.) 이건 뭡니까?
개봉...임...이막...스(IMAX)...(더듬더듬 포스터에 쓰인 글자를 읽는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대부분의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곧 개봉 예정이라는 영화가 눈에 들어옵니다.
I...M...A...X...
...
제목은 난외의 여백.
 
: 당신으로 영화까지 만들었나 봅니다.
심지어 당신과 닮은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아닙니다.
닮은 배우일 겁니다. 하지만... ...
 
최정림:(난외의 여백, 선명하게 쓰인 탓에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말이었다. 한참 그 앞에 선 채로 포스터를 바라본다. 눈 아래 점을 찍고, 머리를 묶고 마스크를 쓴 채였지만 어쩐지 속이 먹먹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내게서, ... 내 연기를 하는 이 배우를 통해 무엇을 보고자 하는 것인가.)
(곧 시선을 거두고 두리번거리며 서경을 찾는다.) 윤 연구원, ...
 
윤서경:(상영시간표를 보느라고 한참 말이 없다가 정림을 바라본다.) 선, 배...니...(조금 떨어진 곳에서 상영시간표를 보던 서경의 얼굴이 굳는다.) 어, 저...저 그, 러니까.... (다급히 다가와 포스터와 정림을 번갈아보다가 손을 잡아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는 바람에...!
 
최정림:(서경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는 사실은 오래 바라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잡힌 손을 꾹 맞잡는다.) ... 아닙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다시 한 번 중얼거린 정림은 옅게 웃는다. 사실은 윤 연구원, 이라는 호칭도 눈에 띄는 것이 아닐까? 별 것을 다 의식하게 되고 만다. 결국 무슨 말을 하려다 말고 서경이 보고 있던 상영 시간표로 시선을 옮겼다.)
 
윤서경:(표정을 굳힌 채 묵묵히 상영시간표 앞으로 정림과 걸어간다. 그 앞에 멈춰 서서 멀거니 시간표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감히 뭐라 말을 붙일까. 이 또한 당신을 향한 지구인들의 애정이라고, 감히 표현해도 될까.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영화별로 시간표가 어지럽게 지나가고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렵습니다만
가장 가까운 영화로는 시간 역설평범한 남고생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인류의 희망이 되어버렸습니다만?이 있습니다.
...
이게 무슨 영화죠?
 
최정림:... (이어지는 침묵에 정림은 괜히 서경의 손만 더 세게 쥔다. 시간인 듯 앞에 쓰인 숫자와 영화 이름이 번잡하게 휙휙 넘어가는 바람에 읽기가 어려웠지만,) 저건 다 영화 제목입니까?
 
윤서경:예. 그렇습니다. (멀뚱히 영화를 바라보다가 괜히 제 입술을 꾹 감쳐문다. 왜 하필 이런 영화만 남은 거야...?)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서배님께서 편하신 쪽이 저도 좋습니다!
 
최정림:(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 <평범한 남고생인 내가 이세계에서는 인류의 희망이 되어버렸습니다만?>을 가리키며,) 저것만 아니면 다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
 
윤서경:저, 그...그럼. (머뭇거리다 잠시 손을 놓더니 어떤 기계 앞으로 다가간다.)
 
: 서경은 당신의 손을 놓더니 어떤 기계 앞으로 다가갑니다.
저 기계는 뭔가요?
기계 앞에서 무언가를 꾹꾹 누르던 서경이 이내 종이 두 장을 들고 돌아옵니다.
 
윤서경:이제는 사람이 하는 일이 적어졌습니다. 저 기계는 영화표를 예매하는 기계입니다. 어... 기계 에 시간과 영화를 입력하면 이렇게 표를 뽑아줍니다. (정림에게 표를 보여주고 시계를 확인한다.) 아마 10분 정도 남았으니 이제 들어가면 딱 맞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준비한 듯한 멘트를 우르르 쏟아냅니다.
 
최정림:(뒤에서 서경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만 끄덕인다.) 극장 구경도 오랜만이네요, (5년? 아니, 어림잡아 6년은 됐을 것이다. 그땐 서경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였을 테지만. 멋쩍은 듯 표를 받아들곤 지나쳐온 난외의 여백 포스터를 한 번 바라보다 앞장서라는 듯이 고갯짓한다.) ... 이왕 변장도 했으니, 윤 연구원이라고 부르지 말까요.
 
윤서경:제가 어... (나이를 계산하다가 조용히 입술을 말아넣는다.) 한참 (매우 작게 말했다.) ... 나이가 적으니까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 어떻게 부르셔도 저는 좋습니다!
 
최정림:어... (한참. 가슴에 ... 날아와 꽂히는 단어가 아닐 수 없다.) ... 서른 살입니다. 서경 씨?, ... 서경아. (이렇게든, 저렇게든 불러 보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린다.)
 
윤서경:(서경아. 라고 부르자마자 한 번 움찔하다가 데구르르 눈동자를 굴린다.) ...예! (한 박자 늦게 대답하고 어물어물 상영관 쪽으로 같이 걸어간다.)
 
최정림:(...) 얼른 들어가자. (아무리 생각해도 삼 년 새 스물 일곱 살이나 더 먹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이 포인트가 제일 싫은 게 아닐까?)
 
: ...
서경을 따라 상영관으로 향합니다.
들어가자 영화가 시작되고 주변에 암막이 찾아옵니다.
영화의 내용은 현실 부적응자에 백수인 주인공이 우연히 발견한 타임머신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인데......
그다지 흥미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 요새는 이런 내용이 인기가 많은가봅니다.
심지어 옆에 있는 서경은 꾸벅 졸고 있군요.
피곤한걸까요?
 
윤서경:(Zzz...)
 
최정림:(타임머신이 있었다면 나부터가 당장 과거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을 곱씹으며... 옆을 바라본다.) ... (역시 많이 피곤하구나. 깨우지 말자.)
 
: 영화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납니다.
마침 서경도 부시시 눈을 뜨는군요.
제대로 본 건 당신 뿐 같습니다.
 
윤서경:헉.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 정림과 핸드폰 시계를 번갈아 쳐다봤다.) 죄, 죄송합니다. 조금 피곤했는지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최정림:굿 모닝. (웃으며 눈 앞에 손 흔들어 준다.) 밤 샜습니까?
 
윤서경:아, 예... 예. 조금... (허둥지둥 가방을 챙겨들다가 뒷목을 문지른다.)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코를 골거나 이를 갈지는 않았는지... 그,그러니까 영화에 방해가 되었다거나...
 
최정림:(빤히 바라보다 주머니에 손 찔러넣은 채 일어난다.) 죄송할 것까지야. 괜찮아요, 그냥 그런 내용이었고... 확실히 취향은 파라다이스나 백야 쪽이라, 잠을 설쳤더라면 같이 잠들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윤서경:죄송합니다. 영화를 잘못골라서... (말 끝을 흐리다가 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저, 이번에 또 갈 곳이 있습니다. 이곳을 갔다가 돌아갈 것인데...
(머뭇거리다가 덧붙인다.) 이번에는 걸어서 이동할 겁니다!
 
최정림:... 그래도 자는 모습 구경은 재밌던데요. (부러 놀리는 투다. 시계를 확인하는 서경을 멀뚱히 보다가 걸어간다는 말에 짧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가깝습니까?
 
윤서경:가깝습니다.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다가 슬쩍 돌아본다.) 저, 선배님. (영화관을 벗어나 걸어가며 시선은 앞에 둔 채 슬쩍 묻는다.) 제 운전이... 많이 불안하십니까?
 
최정림:(일부러 앞을 바라보는 서경 따라 시선은 앞에 둔다.) 아뇨, ... 곧잘 하던걸요. 어차피 내가 믿을 구석도 서ㄱ... 윤 연구원밖에 없고요.
 
윤서경:다행입니다. (짧게 답하고 내심 안심한 듯 빙그레 웃으며 걸어간다. 물론 정림에게는 뒤통수만 보일 테지만...)
 
: 서경은 당신의 손을 잡은 채 어디론가 갑니다.
아직도 갈 곳이 더 남은 걸까요?
벌써 해가 슬슬 지기 시작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이 머나먼 현재에서 당신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윤서경뿐일 겁니다.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 아까와는 다르게 자꾸만 후미진 길로만 가고 있는 건 당신의 착각일까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최정림:... (묵묵히 따라가다 서경의 손 힘주어 꾹 쥔다.) 어디까지 갑니까?
 
윤서경:어... (조금 걸어가다 보이는 건물에 손짓한다.) 이 건물에 들어갈 겁니다. 힘드십니까?
 
최정림:(건물을 올려다본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궁금해서.
 
: 서경은 그저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당신의 손을 잡은 채 건물 안 으로 들어갑니다.
조금씩 불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따라 걷다보면, 도착한 곳은 어느 작은 암실입니다.
그를 따라 건물 안쪽으로 발을 들이면 온통 깜깜해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그는 손을 놓고 어딘가로 걸어갑니다.
그의 발걸음 소리만 들릴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최정림:(온통 캄캄한 곳, 여태껏 이런 암흑은, 이 암전은 익숙해진 공간이건만, 낯선 곳이라서 그런지, 어느새 놓친 손 때문인지. 불안감이 밀려오는 것은 왜일까. 다만 눈이 익길 기다리며 서경의 발걸음 소리를 따라 전진할 뿐이다.)
 
: 암흑의 고요한 공간에서 긴장된 당신의 숨소리만 들리던 그때,
 
: 깜깜했던 공간에 찬란하게 별들이 수놓아진 밤하늘이 펼쳐집니다.
아, 그러고 보니 지구에 도착한 뒤로 별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밤에 잠이 들기 전 봤던 밤하늘은 온통 어둡기만 했었죠.
우주에서 보던 풍경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천체투영관이야 탐사 전에도 여러 번 봤지만, 이건 어딘지 다릅니다.
실제 밤하늘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다운 듯한....... 오로지 지구에서만 볼 수 있는 밤하늘.
 
: 이곳은 달도, 별도, 해도 뜨는 곳.
 
윤서경:마음에 드십니까? (어디선가 전원이라도 키고 온 건지 구석 벽에서 걸어온다. 정림과 천장을 번갈아보다가 활짝 웃었다.)
 
: 그 찬란한 별빛들 아래에서 그가 환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윤서경:이제 지구에서는, 특히 도시에서는 별을 보기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 플라네타리움에서는 인공적으로 만든 지구만의 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착착 겉옷을 벗어 바닥에 깔아둔다. 그간 정림이 봤던 모습 중 가장 환하게 웃어보였다.) 함께 저 별을 탐사하시겠습니까?
 
최정림:(암흑 속에 펼쳐진 밤하늘, 인공적으로 만든 별이라고는 하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언젠가 저곳에 가고 말리라며 훈련했던 나날들, 지구 바깥으로 나가 처음 바라봤던 광경들, 그 안에서 살았던 삼 년-삼십 년-간의 시간들... 순간 숨을 들이키고 만다.) ... 언제 이런 곳을 알아뒀습니까?
(환히 웃는 서경에게 다가간다. 그 얼굴이 어쩐지 자신이 아는 누군가의 낯과 겹쳐지며 묘한 안정감을 가져다 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너무, ... 예뻐서.
 
윤서경:선배님께서 지구를 다시 사랑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림을 바라보다 감격에 찬 표정을 읽고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제가 우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선배님 덕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주를 사랑하고, 달을 사랑하고, 별을 사랑하게 된 건 전부 선배님 덕이었으니까... (천장에 수놓인 수많은 별빛을 다시금 올려다본다. 서경의 입가에 어느 때보다 편안한 웃음이 지어졌다.) 저 또한 선배님께 다시 지구를 사랑할 기회를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어린 시절에, 저희 가족은 비행기 사고로 모두 죽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를 포함해서 말이죠. 저를 제외한 모두가 죽은 그 순간부터... 저는 세상이 무서워졌고 삶의 의지를 잃은 채 살아갔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유품에서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얼마나 빛나던 사람이고, 얼마나 아름답고, 대단한 사람인지에 적혀 있는 그것을 보다가 저는... 선배님 처럼 우주 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담담히 고백하듯 이어지던 말이 잠시 끊어졌다. 벌어진 입술이 다물렸다가 다시 벌어지고, 몇 초간 이어지던 정적 끝에 다시 서경이 말을 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여전히 그 기억에 매여 우주선을 탈 수 없지만... 그래도, 연구원이 되지 않았습니까.
선배님께서 제게 세상을 살아갈 이유를 주셨고, 우주를 사랑할 이유를 주셨기 때문에... (제 할 말을 마친 듯 고개를 숙인다. 느리게 서경이 정림을 돌아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후련한 듯, 편안한 웃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지구를 사랑해주세요.
십 몇 년간 당신을 기다려온 이 땅을 말이죠.
 
최정림:(서경의 말에 정림 역시 환하게 웃어보였다. 여태껏 이곳에 도착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 저도 모르는 새 제게 부여된 의미나, 저를 바라보는 호기심과 관심으로 가득찬 눈들이 부담스럽고, 두려웠을 뿐이지, 스스로가 누군가에게 이런 영향을 줄 수 있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정림이 아는 모습 따위는 오래 전 지워져버린 이 낯선 곳이, 여전히 자신이 발 붙이고 살던, 하늘을 올려다보고 땅에 발을 내딛던 자신의 고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을 뿐이다.) ... 누군가 이런 식으로 나를 생각해준 것은 처음이라,
(정림 자신도 말문이 막힌 듯 한참 어둠과, 희미한 빛 너머로 서경의 윤곽을 훑는다. 그가 담담히 늘어놓는 이야기들을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마음에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 제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털어놓는 일은 정림에게 큰 의미였기에, 그의 말이 끝나갈 무렵 다시금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고맙습니다. 그 말은, ... 그 이야기는 감히 내가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주선을 타지 못해도, 그 어떤 모습이더라도, 지금 윤 연구원은 내가 지구를 사랑하게 될 하나의 이유가 되었으니까.
(서경의 웃음, 정림은 무심코 손을 뻗어 그의 입매와 뺨을 가볍게 어루만진다.) 그러니 사랑하게 될 겁니다. ... 머잖아 내가 이곳을 사랑했던 기억이 날 것 같습니다.
 
윤서경:기쁩니다. 이런 제가 선배님께 드릴 수 있는 건 별로 없지만...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정림을 바라보다가 주머니를 뒤적인다. 금속이 스치는 소리와 동시에 은은한 별빛아래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정림의 손에 쥐어줬다.)
중요한 물건인 것 같아서 제가... (서경의 손에서 체인이 빠져나가고 정림의 손 위에 올려진 그것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혼내시면 안 됩니다...
 
: 아, 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보름달 모양의 펜던트 목걸이입니다.
전시관에 홀로 남겨져 있던 그것이 당신의 손가락에 걸려 아름답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여백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모습으로 말이죠.
 
최정림:(서경이 내민 물건을 바라보고 정림은 넋을 잃은 듯 서 있었다. 제 손 위에 올려진 물건은 제가 그토록 소중한 사람에게 주고 싶었던 ... 그러니까, 어떻게든 지구로 돌아온 이유였던 ...) 어떻게 이걸, ...
(잠시 펜던트를 소중히 감싸쥔 채 수놓인 별들을 바라보던 정림은 서경에게 더 가까이 와 보라는 듯 손짓했다.)
 
윤서경:(혼이라도 나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정림의 표정을 살펴보다가 조심히 다가갔다.) 저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니 문제 없을 겁니다... (제 발 저린 탓에 주절주절 말이 따라붙었다.)
 
최정림:(짧은 시간 동안 낯에 어린 걱정스런 표정에 짧게 웃음 흘린다. 발을 들어 가까이 다가온 서경의 목에 그 팬던트를 걸어주며,) 원래부터 내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 소중한 사람에게 전해주려고 했었죠. 원래 주인은 잃었지만, ... 역시 내가 잊지 못할 누군가에게 남을 물건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감당할게요. (고맙다는 듯 서경을 토닥였다.)
 
윤서경:(목에 닿는 낯선 차가움에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눈을 크게 뜨고 정림을 바라봤다.) 어어... 이거, 이거... (제가 받아도 됩니까? 차마 묻지 못한 말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사라진다. 입술을 꾹 다문 채 한참 정림만 바라보다가 물기가 맺힌 눈이 땅으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저는... 계속 선배님을 도울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드릴 겁니다...
 
: 축축한 눈으로 바라보던 서경은 다시 시계를 확인하더니 금방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고 작게 헛기침합니다.
 
윤서경:더 이곳에 있고 싶지만 이만 돌아가야합니다. 저녁시간이 되면 선배님께 직원분이 식사를 전달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시겠습니까? (정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딘가 한결 편안해진 눈이 기분좋게 휘어지다가 이내 입꼬리까지 따라 올라갔다.) 안전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최정림:정말로, ... 내가 이곳에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해 줘서 고맙습니다. (서경의 반응에 유하게 눈매가 휘어진다. 정림은 손을 내밀어 서경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들키면 더 난처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윤 연구원 아닙니까. 아쉽지만 이 다음은 정말로 다음을 기약해야겠네요.
 
윤서경:저는 ... (상상하다가 입을 금방 다문다. 상사한테 깨지는 건 생각만으로도 곤란한 듯 뒤통수에 땀이 보이는 착시까지 보였다...)
 
: ...
천체투영관을 나와 두 사람은 센터로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 센터에 도착합니다.
역시 가는 길도 편안하지는 않은 서경의 운전실력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네요.
처음 그와 빠져나왔던 그 길 그대로 그의 차에서 내리고, 주차장을 지나고 복도를 함께 거닙니다.
경비원의 눈을 피해 당신의 숙소 앞까지 돌아왔네요.
 
: 서경은 문 앞에 당신을 두고 예의바르게 허리를 꾸벅 숙입니다.
 
윤서경:그럼 편안한 밤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시면 내일 말씀해주시면 시정하겠습니다. (숙였던 허릴 바로하고 정림을 바라본다.)
 
최정림:윤 연구원도 쉬어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가볍게 목례하듯 고개 꾸벅 하고는 웃어보인다.)
 
: 서경은 예의바르게 인사하고 돌아갑니다.
또 다시 당신 혼자입니다, 정림.
이만 쉬어야겠죠.
당신은 저녁을 먹은 후, 혼자 숙소에 남습니다.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최정림?
당신의 지구에게서 느꼈던 거리감이 조금은 괜찮아졌나요?
 
최정림:(다시 문을 열고 숙소로 돌아온다. 고단했지만 자신을 애써 이리저리 데리고 다니던 서경과 새로이 보았던 지구의 모습들이 그렇게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아서, 아니, 오히려 그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도 같은 용기를 주어서.)
 
: 다행입니다.
당신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면, 창가 너머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이 보입니다.
이곳은 달도, 별도, 해도 뜨는 곳. 당신의 지구입니다.
중력처럼 눈꺼풀을 감고 나면.......

 

 
 
: 한 밤중 무전기에서 갑자기 소음이 들려옵니다.
지직거리는 소리 사이로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 최정림 듣기 판정
 
최정림: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26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 정신을 차리고 들어 보니 윤서경의 목소리 같습니다.
지직거리는 소음이 심해서 잘 들리지는 않지만 한마디는 명확하게 들립니다.
 
윤서경: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 ―... ...
 
: 한참을 지직거리며 드문드문 윤서경과 다른 어떤 목소리를 뱉던 무전기는 이내 고요해집니다.
뭔지는 몰라도 그는 굉장히 화가 난 듯 합니다.
혹시 당신과 관련하여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윤서경 없이는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더 잠을 잘 수 있나요, 정림?
그를 찾으러 나가볼까요?
밤이니 감시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정림:(무전기로 들려온 음성에 대뜸 걱정부터 되는 것은 왜일까. 무엇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서경의 안위다. 무전기를 들고 갈까 잠시 고민하다가도 결국은 빈손으로 조용히 문 밖을 나선다.)
 
: 숙소 문을 열면 밖은 컴컴한 복도입니다.
비상구 표시를 따라가면 끝에 희미한 조명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지하 4층부터 지상 23층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 어쩐지 버튼에 불이 전부 꺼져있습니다.
 
: 최정림 관찰력 판정
 
최정림:
관찰력
기준치: 80/40/16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 층을 누르는 버튼 위에 웬 유리판이 있네요.
손가락을 갖다 대볼까요?
 
최정림:(유리판? 슬쩍 눌러본다.)
 
사용자 코드 ST-0218 인식되었습니다.
 
: 어두웠던 엘리베이터 내부와 번호판에 불이 들어오면서 음성이 들려옵니다.
지문 인식을 통해서 버튼이 작동하는 구조인가 봅니다.
다행히 아직 센터 소속으로 등록되어 있었는지...
하지만 17층만 점등된 것으로 보아 갈 수 있는 곳은 그곳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최정림:... (불안한 심정이었지만 결국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17층 버튼을 누른다.)
 
: 엘리베이터가 움직입니다.
 
띵.
 
: 17층에 도착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리면 어제 보았던 그 세 갈래 복도가 보입니다.
왼쪽에는 최정림 프로젝트실, 가운데에는 연구실 001-010, 오른쪽에는 전시관이 있습니다.
어디부터 가 봐야 할까요?
 
최정림:(서경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딜까, 고민하다 연구실 쪽으로 먼저 향한다.)
 
:연구실
1호실부터 10호실이 일렬로 각 문마다 낯선 코드들이 붙어 있습니다.
전부 잠겨있으나...
복도 맨끝에 위치한 10호실만은 잠겨있지 않습니다.
문에는 ST-0619라고 써있습니다.
 
최정림:(한 곳씩 문을 열어보려 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이윽고 ST-0619라고 적힌 마지막 문 앞에 도착해서야 정림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문을 연다.)
 
: 연구실 안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방금까지 사람이 있다 나간 듯 서류며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형광등도 환하게 켜진 상태입니다.
무전기도 있습니다. 이 방 주인은 이걸 두고 대체 어딜 간 거죠?
일단 책장책상, 그리고 화이트보드를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정림:(사람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한데, 주저하지 않고 화이트보드로 다가가 살핀다.
새하얀 화이트보드에는 복잡한 수식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operation: 여백 10호 라고 적혀 있습니다.
 
: 수식을 알고 싶다면, 최정림 교육 판정
 
최정림:
교육
기준치: 80/40/16
굴림: 43
판정결과: 보통 성공
 
: 이건 2020년과 어느 시점 사이의 광년을 계산한 수식입니다.
어디에 쓰는 걸까요?
 
최정림:(시간 단위의 계산, ... 항공우주센터에서 거리가 아닌 시간을 계산한다는 건 뭘까, 역시 정림이 건너온 시간에 대한 연구인 걸까. 책상에 이걸 설명해줄 만한 무언가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
 
: 책상
여러 논문들과 책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우편물일기로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최정림:(남의 물건을 이렇게 함부로 봐도 괜찮은가, 약간 걸리지만 답을 얻으려면 어쩔 수 없다 싶었다. 우편물을 들춰본다.)
 
최정림:(우편물을 두어 번쭘 더 훑어 읽는다. 그러니 이 연구실은 서경의 것이라는 말이고, 저걸 연구하던 것도 서경일 가능성이, ... 우편물을 원래대로 덮어놓고 일기를 집어들었다.)
 
: 일기는 총 4장입니다.
 
: 우편물과 일기를 통해 당신은 이 방이 서경의 방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최정림:(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 나의 귀환 전부터 나를 기다린 사람, 그러나 내가 기다린 그는 아니었던 그 사람. 지금은 나를 생각해주는 유일한 사람. 일기를 덮어 둔다. 시간 역행 프로그램이라는 게, 아무래도 저 수식 이야기인 듯 싶어서. 이곳에 없다면 서경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서경의 책장으로 마저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시간 역행 프로그램이라는 것에 대한 게 있을지도.)
 
: 책장
여러 나라 언어들로 된 천체물리학에 관한 책들이 잔뜩 꽂혀 있습니다.
당신의 숙소와 비슷한 책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만, 훨씬 양이 방대한 것 같습니다.
 
: 최정림 자료조사 판정
 
최정림:
자료조사
기준치: 60/30/12
굴림: 6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어딘지 위화감이 느껴지는 책 한 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언어들과 함께 시간의 관문 개론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책을 읽어보나요?
 
최정림:(시간의 관문 개론? 펼쳐 읽어본다.)
 
시간관문개론
 
: 최정림 SanC (1/1d3)
 
최정림:
SAN Roll
기준치: 46/23/9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 책 사이에 껴 있던 카드 키가 툭 떨어집니다.
 
최정림:... (윤서경 연구원. 속으로 그의 이름을 되뇐다. 책 사이의 카드 키를 주워들곤 이게 뭐지, 앞뒷면을 살폈다.)
 
: 어떤 문을 열 때 필요한 걸까요?
어디에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최정림:(지금은 한시 빨리 서경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뿐이다. 연구실에 없다면? 다른 곳에 있는 걸까. 최대한 물건을 전부 제자리에 돌려 두고 다급히최정림 프로젝트실로 향한다.
 
: 당신은 걸음을 옮깁니다.
저번에도 본 적 있잖습니까?
 
최정림 프로젝트실
 
: 그곳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가봐야할 것 같습니다.
 
: 당신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최정림 프로젝트라고 붙어 있는 문 앞에 도착합니다.
키를 인식하는 기계가 붙어있습니다.
들어가보나요?
 
최정림:(카드 키가 여기에 쓰는 걸까. 조심스럽게 모양대로 맞추어 본다.)
 
: 카드 키를 인식하면 기계음과 함께 철문이 열립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당신 앞에 보이는 것은 아름답게 직조된 우주선입니다.
선체에는 여백 10호라고 써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뛰어나고 유려한 창조물.
우주선 문은 열려있습니다.
이번 역시, 들어가보나요?
 
최정림:... (여백 10호. 우주선이라면 두렵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정말 두려운 것은 여기서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거나, 서경이 찾는 곳에 없는 것 뿐일 테다. 잠시 망설이던 정림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딛는다.)
 
: 우주선 안으로 들어가면 조종석과 조종 계기판이 보입니다.
시간은 삼십 년이 흘렀지만 우주선의 기본 구조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장치들의 생김새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끄러워졌지만, 오히려 당신에게는 오랜 익숙함과 안락함이 느껴집니다.
 
: 최정림 항법 판정
 
최정림:
항법
기준치: 55/27/11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 분명 이게 맞는 것 같은데?
다소 버벅이다 우연히 누른 버튼이 제대로 맞았는지 항법 시스템이 작동됩니다.
화면이 점등하는 동시에 귀에는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백 10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아, 노바 09호의 음성과 동일하군요.
그렇다면 음성 명령을 통해 당신이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정림:시간 역행. (다소 떨리는 음성, 정림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꾹 쥐었다.)
 
시간 역행 프로그램을 실행합니다. 패스워드를 입력해 주세요.
 
최정림:... (잠시 고민한다. 패스워드? 이곳이 최정림 프로젝트실임을 감안하자면, 노바 09나 자신과 관련이 있는 암호일 테다. 실패하면 몇 번까지 기회가 있지? 우선은 차분히 숨을 고른다.) 19901230.
 
시간 역행 프로그램 실행 완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 노바 09호, 아니, 여백 10호의 음성과 함께 화면이 바뀌고 나타난 것은,
 
시간역행
 
: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당신의 귀에 싸늘한 목소리가 꽂힙니다.
 
윤서경:뭐 하시는 거예요?
 
: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건
아, 여백처럼 표정 하나 없는 윤서경입니다.
 
최정림:(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돌아본다. 여전히 차분한 눈으로,) ... 이게 다 뭔지 설명해 주십시오.
 
윤서경:(정림을 바라보던 눈이 실행된 프로그램을 발견하고 크게 흔들린다. 이내 성큼성큼 다가가 정림의 앞에 섰다.)
다 보셨구나. (조금 괴로운 듯 일그러졌던 표정으로 정림을 바라보다 입술을 꽉 깨문다.)
 
최정림:(미안하다는 말은 뱉지 않을 작정이었다. 서경의 낯이 일그러지는 것을, 입술이 다물리는 것을 바라보며 정림은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내가 봐선 안 되는 거였나요?
 
윤서경:저는, 저는... 가족이 당했던 비행기 사고가 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후로 시간을 돌리기 위해 모든 짓을 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고, 수집하고, 계속... 계속... (정신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계기판을 훑다가 훽 고개를 들어 정림을 바라본다.)
프로그램의 원래 좌표는 비행기 사고가 일어난 그날이었습니다. 저는 선배님을 만난 후에 그 날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당신이 두 번의 여백을 경험할 것을 알면서 말입니다.
제가 괴로웠기 때문에, 제가 힘들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래서... (말 끝을 흐리다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보이십니까? (계기판 위에 떠 있는 프로그램 화면으로 탁해진 검은 눈동자가 돌아갔다.)
저는 선배님을 만나고 선배님께서 여백을 괴로워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좌표를 노바 09호의 발사날로 변경했습니다.
방금 센터 위원회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 사람들은 선배님을, 당신을...!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날카롭게 소리친다.) 또 다시 최정림 프로젝트의 파일럿으로 태울 계획입니다. 또, 또 다시 그 궤도에 당신을... 선배님을 또...
내일부터 당장 훈련에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배님... (긴장한 듯 이리저리 늘어놓던 문장이 굳어진다. 조금 더듬거리던 말도 이번 만큼은 분명해졌다.) 지금이 그 모든 여백을 거슬러 올라갈 유일한 기회입니다.
 
: 윤서경은 괴로운,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을 합니다.
지금 당장 1990년 12월 30일로 돌아갈 수 있고, 돌아가야 한다고요.
하지만, 하지만요.
이상하잖아요?
왜냐하면 그때로 돌아가 당신이 노바 09호를 타지 않는다면,
혹은 TR-0922 행성을 가지 않고 돌아온다면,
 
: 그리하여 당신의 옛 연인과 결혼하게 된다면.......
 
윤서경: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선배님. 돌아가세요. 여백 이전으로.
 
윤서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최정림:(서경의 첫마디에 정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헤어나올 수 없는 이 27년에 갇힌 정림과, 사고가 일어난 그 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서경, 정림은 감히 그 지점에서 동질을 느낀다. 마주한 눈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는 내내 가슴 한 구석이 아렸다. 이것은 다만 서경이 그를 닮았기 때문이 아니라 ...)
그래서, ... (서경의 끊어진 말 사이의 공백을 채워넣으려다 그만둔다. 서경은, 자신이 그토록 바라온 것들을 뒤로 하고 정림을 돌려보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 내가 노바09의 항로를 틀어 제대로 귀환한다면, 다시 재성을 만나 그의 손을 잡고 안고, ... 그러니까, 그와 함께하게 된다면 눈앞의 서경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득한 생각들이 정림의 머릿속을 떠돈다.)
(실상은, 정말로 달콤한 생각이다. 그렇게 27년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내가 아는 곳에서 나를 아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생각. 그러나 생각의 향방은 다시 서경에게로 돌아가고야 만다. 정림은 제 눈앞에서 모든 사실을 고백한 그를 결코 외면할 수 없었고, 제게 지구를 사랑할, 지구로 돌아온 것을 후회하지 않을 이유를 만들어준 그가 없게 된다는 사실 또한 견딜 수 없었다.) 윤서경 연구원.
(제 생각은 하지 마세요, 선배님. 내가 어떻게 말입니까, 서경을 바라보는 정림의 눈에 차오르는 것은 어느덧 애수다.) 내게 너무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지 않나요, ... (이미 내게서, 당신에게서 사라진 사람들을 찾기 위해 그 공백을 거슬러 올라가라는 것 말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하지 않고, 나의 공백을 메우라는 말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이십 칠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내게는 결국 당신이라는 공백이 생길 텐데. 정림은 말없이 서경을 바라보며 웃는다.)
 
윤서경:(반은 미친 사람처럼 주절주절 떠든 꼴이 얼마나, 얼마나...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나의 목표, 나의 우주와 같은 당신에게 보인 꼴을 처절히 후회할까. 공백을 거스른 당신으로 인해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가만히 생각에 잠긴 채 허공을 바라보던 눈에 축축하게 물기가 맺혔다. 윤서경 연구원. 억겁같은 시간이 흐르고 그의 부름 이후에나 고개를 들어 정림의 웃는 낯을 바라봤다.) 선배님...
 
최정림:(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백 10호의 음성, 그 음성 한참 뒤에서야 정림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시간 역행 프로젝트 폐기. (이상하리만치 단호하고 희망찬, 그러나 어쩐지 슬픈 것 같기도, 무언가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한 목소리. 정림은 서경의 낯을 피하지 않고 바로 마주본다.) 함께, 탐사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플라네타리움에서,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면서. 이곳에서 떠나면, 내가 살아갈 27년의 공백을 당신이 살아가야 할 무수한 날들과 바꾸는 셈이 되니까. 나는 나의 공백을 살아갈 테니, 당신 역시 돌아보지 말고 함께 가자고.) 2020년에 이 말이 유치하게 되었다면 유감스러울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 약속해요.
 
윤서경:(서경의 눈빛이 크게 흔들린다. 숨을 내쉴 때마다 흉곽이 조금씩 움직였다. 공백을, 당신이 넘어온 공백을 2020년의 지구가 채울 수 있을까. 걱정했던 나날이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이내 서경은 어깨를 작게 들썩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겠, 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가 함께 살아가겠습니다. 선배님의 곁을 보조하며 제가 공백보다 큰 앞으로의 미래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약속하겠습니다.
 
: 당신은 시간 역행 프로그램을 폐기합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1990년의 지구를 왜 포기하고 있나요?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 당신 스스로가 더 잘 알겁니다.
이것은 오롯하게 당신의 선택이고, 최정림.
 
당신이 살아내야 할 여백입니다.
 
다름아닌 이 2020년의 지구에서.
 
: ...
 
프로그램 삭제 가동. 10, 9, 8.......
 
: 최정림. 결국 당신은
여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6,5,4 .... ...
 
3,2,1 ....
 
...
...
...
 
 
 
 
여백 10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최정림
 
: 오늘은 날이 유난히 화창하고 따사롭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아름답네요.
귀에 들리는 음성은 이제 꼭 가족같이 느껴져요.
지난 일 년 간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2020년의 지구에 적응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TV도 잘 켜고,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도 주문할 줄 알며, 얼마 전엔 4DX 영화도 관람했어요.
 
: 2020년의 지구는 여백이 살기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새롭고 낯설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백 10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윤서경
 
: 그리고 최정림 프로젝트의 파일럿은 꼭 당연한 수순처럼 당신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윤서경은 당신만 보낼 수 없담녀서 재활 훈련을 시작했고...
결국 우주 비행사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2020년의 중력에 적응하는 동안, 윤서경은 여백의 무중력에 적응한 셈입니다.
 
윤서경:저, 선배님... 정말 가셔도 괜찮으세요? (머뭇머뭇 여전히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다가와 이리저리 정림의 우줍복 여기저기를 살펴본다.) 제가 진짜 걱정되어서요... 지금이라도 취소하려면 취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핑계로 알아둔 질병이 47개정도 되니까 그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라고
윤서경이 당신의 우주복 여기저기를 확인하며 말합니다.
이번 탐사가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일 년 혹은 삼 년이 걸릴 수도, 어쩌면 다시 삼십 년이 걸릴지도요.
하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 몇 년이 걸리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요.
 
: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이 광활하고 아름다운 우주에서 함께하고 있잖아요.
 
최정림:안 괜찮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든든한 후배가 있는데 말입니다. 제 우주복을 점검하는 것도 그저 가만 두고 보고 있을 뿐이다.) ... 여태껏 훈련이 아니라 핑계 만드는 데 전념했나요. (47개라니, 정림이 짧게 웃었다.) 걱정되면 후배님은 47개 중 하나 골라서 나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지구에서 기다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윤서경:예? 절대 안 됩니다. 어떻게 선배님을 혼자 가시게 둡니까? (고개를 도리질 치고 얌전히 조종석 안에 앉으며 정림을 돌아본다.) 저 열심히 훈련했습니다. 제가 차 운전 실력은 서툴어도 이건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안하고 환한 웃음을 짓는다.) 함께 가겠습니다.
 
최정림:(귀엽단 듯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래도 다녀오면 내가 면허를 따야지, 그건 영 안 되겠습니다. (서경의 미소에 곁에 와 제 자리에 앉는다.) 믿고 있습니다. 든든하네요.
 
: 이륙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나란히 앉은 조종석 안, 윤서경과 당신은 이륙음과 동시에 마주하는 시선에서 예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이 두 번째 여백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 두 사람은 함께 여백 10호를 탐사를 떠나게 됩니다. 우리가 다시 시간의 관문을 만날지 혹은 온전한 시간선으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우리가 그 모든 순간들을 함께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